매체와 문학 : 디카시의 존재론적 위상 / 김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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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영 댓글 0건 조회 23,048회 작성일 15-05-21 12:02본문
매체와 문학 : 디카시의 존재론적 위상
- 김석준(문학평론가)
글을 들어가며
한때 문학은 인문학은 물론 인간학의 최정상에 위치해 있었다. 한때 문학은 영혼을 담보로 이 세계와 공명했던 진실의 언어였다. 분명 한때 문학은 이미지에 앞서 실재를 압박하며 인간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봉합하는 인륜적 실체였다. 한때 문학은 어떠한 매체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문자로 세계와 진실을 압박하는 절대적인 주체였다. 한때 문학은 인륜성을 대변하는 꽃이자 여왕이었고, 꿈과 이상을 실현시키는 개관적 상관물이었다.
문학의 예술적 지평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으로 물꼬를 틀어 문학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언을 표명하기에 이른다. 앨빈 카넌의 『문학의 죽음』이 그렇고,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인하기에 이른다. 너무 빨리 독문학이 포기되고, 불문학과 한문학 또한 사망 선고가 내려진 채 가사상태에 이르렀다. 도대체 왜 수천 년 동안 심금을 울렸던 문학이 전혀 예기치 못한 매체 환경에 굴복한 채 문학 생산자가 소비자로 전락하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전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카이브에만 소장된 채 담론의 질서로 연구될 때, 그것은 어떤 의미를 현동 시킨 것인가? 전혀 확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와 공명하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섹터로 존재하며 이해되지 않는 방언만을 지껄이고 있을 따름이다.
사실 이 지점이 중요한데, 그것은 현재 문학이 처한 존재론적 위치를 정확하게 대변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혁명이 지배하는 21세기에 문학은 진실을 압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적 향유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점점 정통문학의 장은 협소해져 읽히지 않는 문자로 전락한 채 이미지에 의해 굴복 당하게 된다. 문학의 현재와 미래는 미디어의 이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디어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고 조정하는 궁극적인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으로 매체의 현실이 바로 문학이 처한 현실이라는 말을 성립시키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은 문화지체를 경험하게 된다. 미디어의 역량이 문학의 환경을 완벽하게 장악하게 되었으며, 문학의 형상화 전략 또한 수정된다. 바로 21세기 디지털 환경의 중심에 다카시가 위치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디지털문명과 조우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인 동시에 문학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계기이다.
외형적으로 볼 때, 시인이 숫자가 이만 명에 달하고, 경향 각지에서 시전문 문예지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외형상의 화려함과 달리 시는 독자의 심금을 울지 못한다. 왜 그런가? 왜 시는 일반 독자층에게 다가가 인륜성을 고양시키거나 인간학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밀폐된 공간에서 침겁하며 소통하기를 거부하는가? 문학의 죽음은 문학사가 초래한 죽음이자, 문학의 기호 자체가 점점 소통할 수 없는 것으로 코드화되어 가는 까닭에 그러하다.
문학 내적 환경이 점점 협소하게 경색되어가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문학장이 멀티미디어가 지배하는 문학 외적 환경을 철저하게 도외시하는 데에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분명 21세기는 자본과 결합한 디지털 문명이 이 세계를 선도하여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환경과 문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21세기 문학의 지형도가 재편되는데, 그것을 잘 이용하고 응용하면 창조력 역량이 강화되는 문학의 신기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시적 구성물들이 창조되고, 다양한 유통경로를 통해서 문학이 향유의 대상으로 확산이 되겠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구현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있다. 아직 가지 않았고, 어떠한 방식으로 문학장이 재구성될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디카시는 21세기의 시가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2. 미디어의 혁명 혹은 신문체반정(문학의 혁신)
문학장이 어떻게 변해갈 지 아무도 모른다. 미디어의 진화 속도는 가히 폭발적이어서 우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다준다. 미디어의 혁명은 기존의 문학체계를 붕괴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문학의 양식을 요구하게 이른다. 신문체반정이 이루어진다. 이때 신문체반정은 보수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정조의 문체반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이룩된 언어의 체계 일체를 전도 전복시키는 엄밀한 의미의 시적 언어의 혁명을 함의하고 있다. 미디어의 혁명은 문자의 존재 방식을 일거에 무너트렸을 뿐만 아니라, 문자에 앞서 이미지가 인식을 포획하는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변모시키기에 이른다.
문자가 괴멸된 자리에 새로운 이미지―문자가 자리하게 된다. 이미지는 21세기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주체일 뿐만 아니라, 신문체반정을 이끄는 절대심급이다. 말과 세계 사이의 균열이나 봉합만을 언급하는 인간학은 더 이상 문학의 중심에 위치할 수 없다. 인간학으로서의 문학은 20세기의 종료와 함께 이미 소멸시효가 다된 죽은 문학이자, 카프카(혹은 상징주의)를 정점으로 쇠퇴하여 더 이상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문학의 죽음은 디지털 이념을 대변하는 이미지와 사유를 압박하는 문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활을 건 싸움에서 비롯하는데, 그것은 이미 문학의 완패로 결판이 난 승부에 다름 아니다.
신문체반정이 요구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21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문학적 형식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디지털과 결합한 형식이거나 디지털 이념에 부합하는 전혀 새로운 형식임에 틀림없다. 카프카와 상징주의를 통해 화려하게 꽃피운 정통문학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추동할 서사도 없고, 언어의 표현법도 없다. 정통의 괴멸이 이루어진다. 정통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것이거나 읽힐 수 없는 문자이다. 정통은 사어이다. 정통은 문체반정을 요구했던 정조의 복고지향적인 저항이다. 정통은 거대한 흐름 앞에 휩쓸려 문학의 혁신을 자인하게 되는데, 그것이 21세기가 요구하는 신문체반정의 정체라 하겠다. 마치 연암 박지원의 패사소품체라는 새로운 글쓰기의 방식이 문학의 혁신을 이룩하는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것처럼, 디지털 미디어의 혁명은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문자의 존재 방식 전체를 일신시키기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독자로부터의 소외는 새로운 문학이 태동되는 계기이다. 물론 21세기를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의 이념은 철저하게 자본의 기호로 무장하여 자본화가 불가능한 것들을 철저하게 소외시키고 있지만, 따라서 정통 문학은 서서히 고사되어 흔적으로만 남을 개연성이 없지 않아 있지만, 문학은 신문체반정이라 강수를 통해서 스스로를 변신시켜 시대의 이념과 적극적으로 상면해야만 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문학은 디지털 매체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서 문자의 외연을 확장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21세기 문학이 존재하는 언어의 현실이다.
신문체반정은 직간접적으로 멀티미디어와 결합하는 형태를 취하는 동시에 언어의 환경을 멀티미디어에 적응시키는 미적 형태의 신기원이다. 물론 문학의 혁신은 아직 실험적인 과정 중에 있고,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진화해갈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다. 현재 디카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적 실험을 완료한 채 어느 정도 그 형태가 정착된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그것의 확산력이다. 사실 후기산업사회의 기본 화두는 모든 의미의 체계를 향유에 두고 있고 또 그러한 까닭에 향유되지 않는 문학은 전혀 유통이 되지 않는다. 향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혹은 이용가능성과 계산가능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를 내린다.
물론 여전히 문제의 중심에 문학이 일반 대중과 공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놓여있지만, 따라서 문학의 혁신을 주도하는 신문체반정이 21세기 문학을 새로운 형태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추측이 되지만, 엄밀히 말해서 기존의 정통적 문학이 간과한 것은 매체의 역량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매체는 인식의 주체이고, 이 세계를 대변하는 인륜성의 총아이다. 매체는 신문체반정이 일어나는 궁극적인 원인이자, 새로운 시적 지평을 산출되는 문학장의 중심이다. 비록 여전히 이만 명에 달하는 시인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든든하게 떠받치며, 현재의 문학적 행태를 추인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던 한 세대가 사라지고 디지털 세대가 완벽하게 이 세계를 장악한 순간, 정통의 문학은 구시대의 유물로 아카이브에 남아 먼지만 풀풀 날린지 모른다.
따라서 신문체반정은 0과 1 사이에서 생산된 마술적인 이미지에 열광하는 디지털 세대에게 인간학을 대변하는 문학의 향기를 고스란히 전이시키는 교량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디지털 세대에게 문학은 그리 강렬한 미적 코드가 아닐 뿐만 아니라, 너무도 평범한 지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학의 혁신을 추구하는 신문체반정도 환상적인 시각적 이미지의 구성물에 길들여진 세대에게 인간학적 향기를 반조하는 의식의 구성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불안하다.
3. 디카시의 존재론적 위치와 미래 지평
점점 더 폭력적이고, 잔인해져만 간다. 21세기의 외연이 점점 거세져만 가는 자본의 상징적인 힘의 표현력이라면, 그의 내포는 디지털로 구조화된 문명의 신기원이다. 점점 더 착취적이었으며, 마침내 상생의 리듬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갈등만을 증폭시키게 된다. 인간애가 사라진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공명하며, 지구 멸망이 도래해도 내일을 위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적 인간형이 사라진다. 자살폭탄 테러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사이코패스가 도시를 공포에 떨게 만든다. 공감하지 않고, 결코 나누지 않았으며 마침내 인간학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엄밀히 말해서 미래에 대한 기대지평은 문명의 발전과는 정반대로 점점 암울한 전조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자본의 타자로 존재했던 문학은 읽히지 않은 문자로 전락해져만 가고, 인륜성은 고사 일보직전이다. 관조하지 않는다. 생을 성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학적 현실을 향락의 전이로 조건짓에 이른다. 겉으로 보기에 21세기를 관류하는 제반 조건들은 디지털 문명과 더불어 테크노토피아를 이룩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 내적 실체를 바라다보면 갈등과 분열의 극한만을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도대체 시인은 이 가열한 욕망만으로 구조화된 21세기의 자본적 현실을 어떤 시말로 육화시켜야 하는가? 지평 융합이 이루어진다. 지평 융합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형태를 창조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디지털 세기를 포월하는 따스한 감성의 전언이 아니면 안 된다. 철저하게 계산된 차가운 디지털 이미지들에게 말이 다가간다. 말이 이미지를 포월하고 인간학을 재건한다. 말은 그 형식 고하를 막론하고 상처와 갈등으로 점철된 21세기의 디지털 문명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인간학을 복원하는 숭고한 실재라 하겠다.
말하자면 말과 디지털의 융합은 새로운 시적 언어의 지형도를 설계하는 신문체반정의 주체인데, 그것은 문학의 미래 지평이라 하겠다. 지평은 끊임없이 융합하여 핵폭발을 일으킨다. 지평과 지평 사이에 미지의 독립변수가 있어, 미래 지평을 예단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따라서 인륜성을 대변하는 미래의 문학이 어떤 형태를 띠는지 그 정체가 모호한 것도 사실이지만, 미디어의 혁명이 사회 환경은 물론 문학장 또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특히 디카시는 그러한 경우의 적확한 예인데, 소통과 담을 쌓고 있는 문학장을 쇄신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이다. 신문체반정은 디카시가 구현하는 언어와 이미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평 융합이 아니고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디카시는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시예술인 동시에 이미지와 언어 사이에 균열을 봉합할 수 있는 최초의 예술적 시도이기 때문이다. 전혀 대중의 소통과는 무관하게 문학의 기호만을 시인의 임무라고 추구하는 정통문학장은 독자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채 읽히지 않는 문자로 자멸에 이르게 된다.
물론 그러한 현상은 문자를 미학의 원리로 삼은 시 그 자체의 운명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시의 예술적 지평은 언어를 압살하는 것으로 자신의 미적 임무를 완료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디카시가 위치하게 되는데, 그것은 늘 이중의 사명을 걸머진 고난의 여정일지 모른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디카시의 존재론적 위치는 21세기를 대표하는 시양식으로 자리메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동시에 문학의 죽음에서 다시 부활을 알리는 전주곡으로 이 세계와 공명할지도 모른다.
아직 인지도 면에서 다카시의 위상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따라서 이종교배된 하이브리드 장르인 까닭에 그 정체성이 모호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지만, 디카시는 21세기의 이념에 적확하게 대응되는 시예술로 고양될 수 있다. 쌍방향 식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이미지와 말의 지평융합을 통해서 언어의 기대지평이 무한히 확대된다. 말하자면 다카시는 문자의 협소한 공간을 벗어나 문자와 이미지의 결합이라는 신기원을 이룩하게 되는데, 그것은 말의 운명을 혁신시키는 신문체반정의 효시라 하겠다.
이미지와 언어의 조응 혹은 현전 이미지의 서정적 포월. 디카시는 포월이다. 디카시는 새로운 심미적 이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인간학과 디지털 문명 사이의 균열을 봉합하는 최초의 의식적 구성물인데, 그것은 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의 자화상을 반조할 수 있는 따스한 감성의 전언들로 구조화된 서정의 새로운 양식임에 틀림없다. 문자의 한계에 도달한 정통문학과 달리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다다가 잔잔한 감동을 전하며 지친 일상을 위무하는 디카시는 자본으로 구조화된 21세기를 신서정으로 이끌어 인간학을 재건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디카시는 문명의 利器를 감성으로 포월하는 의식의 산물이자, 뮤즈의 전당을 혁신시킨 그야말로 시적 언어의 혁명의 주체에 해당한다 하겠다. 여전히 일반 독자층으로 확산시켜 자신의 위치를 공고함은 물론 하나의 장르로 인정을 받는 것이 문제로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디카시는 현대성을 표현하는 최적의 장소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자본의 욕망으로 점철된 현대성이 차가운 이성에 의해 스스로를 표현하는 반면, 디카시는 그 차가운 이성의 기표들을 따스한 감정으로 포월하는 그야말로 21세기의 서정의 새로운 양식이다.
4. 디카시의 수용미학적 접근 : 대중과의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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