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사진의 섞임과 스밈 / 변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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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영 댓글 0건 조회 22,832회 작성일 15-05-21 12:08본문
문자와 사진의 섞임과
스밈
― 김상미의 디카시를 읽다
/ 변종태(시인)
1. 소통의 새로운 방식
인간의 소통 방식이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통해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독자들께서는 가장 최근에 손편지를
쓴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시는지? 펜을 잡고 메모를 하신 기억은 있으신지? 컴퓨터 전자 우편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SMS로 간단하게
소식을 전달한다거나, 스마트 폰의 앱을 열고 키보드를 눌러 메모를 하고, 카메라보다는 스마트 폰에 내장된 카메라로 일상을 찍으며, 그것을
SNS를 통해 지인들과 공유하는 것이 현대의 소통 방식이란다. 3G로 구현되던 폴더 폰의 시대가 가고, 바야흐로 LTE를 기반으로 한 스마트
폰의 시대가 도래하니 모든 정보가 엄청난 주파수 대역으로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는 듯하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처음 등장할 당시를 회상하며,
많은 사람이 회화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다고 했던 일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어디에서도 화가 지망생들이 없어서 미술학과가 문을 닫았다는 말을
들은 일은 없다.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대여하고 필름을 팔고, 현상을 맡기고 인화되는 시간의 기다림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세상이 바뀌어도 참
많이 바뀌었다고 할 것이다. 이른바 디지털 혁명으로 불리는 오늘날, 필름 생산업체가 문을 닫고, 사진관들도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시점이고
보면, 예술만 자기의 영역과 형식을 고집하다가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소통의 매체가 달라지면서, 문학예술의
현상들도 그 양상을 달리하면서 상당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으로 문학의 종말을 걱정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문학은 아무리
정보화되더라도 그리 쉽사리 죽지 않을 듯하다.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기는 느낌은 쉽사리 포기하기 어려운 매력인 탓도 있을 것이다. 다만 매체에
맞게 진화를 거듭하여, 시의 경우도 잡지를 통해 발표되고 읽히던 시대와 더불어, 디카시가 급속히 확산이 되면서,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에 시적
이미지를 얹어서 지인들과 공유하는 방식이 점차 보편화하고 있는 양상이다.
주지하다시피 디카시는 ‘디카 + 시’의 합성 신조어로서, 시의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이에서 얻은 시적 영감의 결합이 한 편의 디카시로 탄생한다. 하지만 이 둘을 굳이
구분한다면, 사진은 ‘무엇’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시는 ‘어떻게’에 초점이 맞춰진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피사체인 ‘무엇’을 찍고 나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데 관심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자시는 무엇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결국 디카시는 새로운 장르의 형식이라기보다는 시의 새로운 소통 방식에 방점을 찍을 수 있는 셈이 된다.
2. 문자만으로 읽는 시
김상미의 신작 디카시 5편은 앞에서 언급한 디카시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사진은 제외하고 문자시로만 김상미 시인의 신작 5편을 읽어보기로 한다. 우선 「오래된 꿈」을 보자. 바다를 향해 환하게 창이 열려 있다. 열린 창으로 파도가 집안까지 밀려올 듯이 포말을 일으키고 있다. 저 창가에 서면 알싸한 갯내음이 영혼을 적실 것만 같다. 그렇게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창으로 무변광대한 바다의 복판으로 나를 이끌 것만 같은 느낌이 온전히 스며 있다. ‘이런 창을 가진 남자와 사귀고 싶다’는 꿈은 현실에 대한 갑갑함에 기인한다. 사방이 꽉 막힌 도회에 갇혀 살던 화자에게 환하게 트인 창은 탈출구인 동시에 이런 공간을 오래도록 꿈꿔온 화자의 이상향인 셈이다. 파도를 밀어오는 바다를 보면서 근육질의 ‘남자’를 떠올리는 것은 자신을 편안히 의지할 수 있는 이상형인 셈이다. 이 시의 문자시 부분만을 읽어 보자.
이런 창을 가진 남자와 사귀고 싶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끝없이 입 맞추며 질주하는
그 무한에 건배하며 나를 던지고
싶다
내가 사는 이 도시는 너무나 비좁고
숨이 막혀!
― 김상미 「오래된 꿈」 전문.
문자시만을 읽었을 때는 화자가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지 독자들의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각의 창틀에 담긴 바다, 그리고 열린 격자창, 투명한 유리 바깥의 노란 색지가 주는 대비는 시인이 꿈꾸는 것을 구체화하는 풍경인 동시에, 독자들 또한 그 세계로 자연스레 스미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시의 느낌은 「석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자시로만 읽었을 때는 ‘석양’에 대한 주관적 체험에 바탕을 둔 추상적인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려지지만, 한 편의 디카시로서 시인이 본 풍경을 시각적으로 공유하게 되는 경우, 저절로 감탄사를 뱉게 된다.
매일매일 만나면서도 언제나 처음인 듯
놀라 고동치며 바라보게 되는
황혼녘 캔버스
― 김상미 「석양」 전문.
부처님 오신 날 사찰 도량 마당에 내걸린 수많은 연등을 보면서, 그 연등을 내건 ‘울 엄마, 울 할머니, 울 이모’들의 마음까지를 헤아린 듯하다, 그들의 간절한 기원은 그 어떤 부정不淨도 함유하지 않은 순수한 투명이다. 부처님 앞에서 남을 해코지하거나 탐욕을 담은 기원을 할 사람은 없다. 그 마음들이 조롱조롱 내걸린 법당 앞의 풍경은 가장 순수하게 단장한 중생들의 마음을 닮았다는 시인의 시선이, 부처님을 마중 나온 이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그려내고 있다.
끝도 없이 ‘나무아미타불’ 기도하는
저 간절하고 어여쁜 꽃송이들을 보라
부처님이 언제 오시나 어디쯤 오시나
곱게
단장하고 마중 나온
울 엄마, 울 할머니, 울 이모 얼굴 같은!
― 김상미 「연등」 전문.
책꽂이에 즐비하게 꽂힌 책들을 ‘역驛’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 재미있다. 물론 실제 백석역白石驛은 수도권 전철 3호선이 운행되는,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에 있는 전철역이다. 문자시로만 읽으면 독자들은 실제의 전철역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디카시에 등장하는 것은 실제 전철역이 아니라 백석의 시집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 앞에 ‘푸른 버스’ 장난감마저 놓여 있다. 백석 시인의 이미지와 백석역과 백석의 시집이 오버랩 되면서 시의 이미지나 의미는 증폭된다. 아마도 몇 역驛을 지나면 앙리 미쇼 역을 지나고 랭보 역을 지나 종착역인 실비아 플라스 역에 도작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집나무숲으로 스며들면서, 패배가 아닌, 세상을 버리는 것이라는 시인의 외침은 현실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한 방식으로 읽힌다.
푸른 버스를 타고 오늘은 백석역에 내렸네
쓸쓸히 혼자 소주를 마시며 백석을 베끼네
내가 시집나무
숲으로 자꾸만 숨어드는 것도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 김상미 「백석을 베끼다」 전문.
명명命名은 나와 남을 구분 짓는 동시에 대상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 처음 태어나면 이름을 붙여 출생신고를 하고, 그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여성들의 경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이름을 잃어 버려, 누구 엄마로 불리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하물며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아줌마는 ‘생선아줌마’로 불리게 된다. 생선만을 다듬다 보니 자신은 없어지고, 자신의 이름 세 글자는 휘발되어버리고 생선아줌마라 불리는 현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초상이 아닐까 싶다.
내 생의 대부분을 생선 팔고 다듬는 것으로 보냈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없어지고
내 이름도 없어지고
사람들은 모두
나를 생선아줌마라 부르네
― 김상미 「생선아줌마」 전문.
3. 영혼을 찍는 카메라
현대인들에게 스마트 폰은 필수품이라기보다는 신체의 일부분이라 여겨질 만큼 삶에 밀착되어 있다. 그러기에 분실하는 순간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그 안에 내장된 연락처, 사진, 음악, 메모에 이르기까지 한 개인의 삶의 전반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스마트 폰을 이용한 디카시의 창작과 나눔은 문학의 흐름을 바꾸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디카시라는 것의 출현에 대해 문단에서 신기하고 낯선, 혹은 이단인 듯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일시적인 유행 정도로만 생각하다가, 이제 그 흐름이
낯설지 않게 보편화하기 시작하면서 디카시는 자연스런 문학 현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사진은 제외하고 문자시로만 김상미 시인의
신작 5편을 읽어보았다. 분명한 것은 디카시를 전제로 창작된 이 작품들에서 사진을 떼어내고 나면 원래 시작 의도나 의미와는 확연히 다른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어쩌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다. 이렇듯 나란히 사진과 함께 있을 때의 디카시와 문자만 있을
때의 차이를 읽어본다면 디카시가 지니는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문자로만 되어 있는 상태로 살펴보았다.
개인적으로 디카시를 전제로 한 경우와, 문자시를 전제로 한 경우의 창작에 임하는 심리는 많이 다름을 스스로도 느낀다. 문자로 부족한
부분을 사진이 채워주거나, 사진으로 드러내지 못할 이미지를 문자로 표현하는 보완적인 관계에서 디카시의 존재 근거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측면에서 김상미 시인의 신작 디카시 5편은 점점 그 자리를 찾아가는 디카시의 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는 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인쇄된 형태로 디카시가 제공되고 있는데, 매체의 특성상 이 디카시가 다시 서적 형태로 인쇄되었을 경우 모바일을 통한 SMS
전송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줄 것이라는 점도 고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디카시를 감상할 때, 사진을 찍는 바로 그 순간 시인의 느낌을
떠올려 본다면 시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디카시의 특장特長은 사진과 문자의 어우러짐이라 할 수 있겠다. 사진과
문자가 함께 있다고 해서 무작정 디카시라 할 수는 없다. 비유컨대 그것은 물에다가 김치와 양념을 비롯한 갖은 재료들을 섞어놓았다고 김치찌개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섞임만으로 요리가 되지 않고, 각각의 재료들이 서로 어우러져 서로가 서로에게 스밀 때 요리가
되는 것처럼, 디카시 또한 사진과 문자시가 서로에게 스밀 때 진정한 작품으로서의 디카시가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상미
시인의 신작 5편은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시인 나름의 상상력으로 끓여 맛깔스런 디카시를 만들어냄으로써
현대인들의 바람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변종태 제주 출생. 1990년 《다층》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미친 닭을 위한 변명』 외.
현재 《다층》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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