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영상 시대, 디지털카메라를 활용한 시쓰기 전략-디카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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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723회 작성일 12-03-27 11:18본문
-----------------<<신생>> 2009. 여름 쟁점평론
1. 모든 길은 영상(?)으로
오랜만에 영화 한 편을 보았다. 팔순의 농부와 30년을 함께 한 늙은 소 얘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다. 이 영화는 최 노인과 늙은 소가 전경화되는 영상물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영화가 지난 3월 관객수 97만1천명을 기록하여 최대 흥행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영상의 힘을 느꼈다. 소가 노쇠하여 제대로 걸음을 옮길 수도 없는데 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비틀거릴지언정 뚜벅뚜벅 걸어가는 억척스러운 모습이나 소달구지를 타고 졸고 있는 노인의 태평스러운 모습 등의 영상 이미지는 매우 강렬한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눈겨겨 볼만한 것은 대사나 해설 따위의 언어는 최소화되었고, 그래서 오히려 시적 영상으로 다가온 점이다. 영상에 의해서 언어(문자)가 탄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영상을, 예전에는 TV나 영화에서 주로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송출할 수 있기까지 하는 디지털 영상 소통 시대를 맞았다.
가령, 길을 가다가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을 만났을 때,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기 위해서 종이에다 그것을 묘사하여 편지를 보내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제는 휴대폰 디카로 영상(동영상 포함)을 찍어서 멀티메일로 실시간 전송해버리면 된다. 이렇게 영상으로의 소통이 실시간 가능한 디지털 혁명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새로운 소통 환경에서는 제 분야에서 걸쳐 디지털 테크놀리지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영상과 새로운 대화가 활발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학 내부에서도 소설과 비평과 시와 희곡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고 있으며, 문학 외부에서도 문학과 타 예술 장르 ․ 타 학문 사이의 경계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문학과 영상이나 문학과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과 과학이나 문학과 테크놀리지 사이에서도 활발한 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예컨대 최근 창립된 ‘문학과 영상학회’, ‘영상 문화학회’, ‘영상영어교육학회’ 같은 전국 규모의 학회들이나 대학원에 설치된 과학사 ․ 고학철학과 인문학 사이의 협동과정도 바로 그러한 탈장르적 맥락에서 생겨난 것들이다.1)
디지털 시대를 맞아 문학 장르간의 경계, 문학과 타 예술 장르간의 경계도 점점 모호해지면서 다양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키워드는 역시 ‘문학과 영상학회’, ‘영상 문화학회’ 등의 명칭에서도 나타나듯이, 영상의 수용 방식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지금 디지털 영상으로 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영상으로 소통하는 시대에 이제 시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쟁점평론으로 ‘시와 영상’이 기획된 것이 아니겠는가.
2. 디지털 영상 시대, 시가 진화하고 있다
일찍이 최혜실은 변하지 않는 인문 정신, 그리고 문학에 대한 정의 때문에 정말 할 수 있는 부분, 정말 해야 할 부분을 놓치고 있다면서 문학은 변화된 환경에서 스스로 몸 바꾸기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폐쇄된 자기 영역에 안주하여 새로운 문화 환경을 비판만 한다면 문학은 자본주의의 경쟁논리 속에서 스스로를 왜곡시키고 축소시키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문학은 문자성을 더욱 강조한 채 소수 집단을 위한 향유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든지, 아니면 문자성을 본질로 한 채 영상물까지 아우르게끔 자신의 영역을 개방하든지 결정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2)
시라는 이데아도 어느 시대나 고정불변의 것일 테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현상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음성언어 시대의 시와 문자언어 시대의 시, 나아가 뉴미디어 시대의 시는 각양 다른 국면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가 바로 메시지다”라는 마샬 맥루한의 유명한 말은 현대 정보 산업 사회의 의사 소통 체계를 요약한다. 의사를 소통하기 위하여 어떤 수단을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의사 소통의 내용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디어가 바뀌면 메시지도 바뀐다는 이 명제는 21세기 사이버 문명의 본질이다. 문자 문화, 인쇄 문화를 통한 아날로그적인 세계가 비디오 문화, 전자 문화를 통한 디지털 세계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또한 종래의 디지털 문화는 더더욱 새로워진 뉴디지털 문화로 발전하고 있다. 미디어의 개념이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뉴미디어의 개념이 나타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아날로그적 문명의 중심이 책이었다면 디지털 세계의 중심은 컴퓨터이다. 이러한 변화 국면에서 우리는 아날로그적 예술과 디지털적 예술의 상관성과 차이점에 관하여 되묻지 않을 수 없다.3)
의사 소통의 수단이 내용 자체를 조종하게 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에서 충분히 목격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고 있다. 소통 수단이 음성언어에서 문자언어로 바뀔 때에도 시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졌듯이, 문자 중심에서 뉴미디어인 디지털 영상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실상 디지털 시대는 단순히 시를 쓰느냐, 시를 치느냐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4)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이른바 ‘시적인 것’의 개념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적이라는 것의 개념은 시대를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으며, 현재 그 변화는 시인과 독자 양쪽에서 시적인 것의 개념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바, 그 근저에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디지털 기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5)
우리 주변의 새로운 감성의 디지털 세대 등장에 대하여, 최동호는 <이슈의 숲길․8/공연시에 대하여>라는 대담6)에서 실감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최근 우리 주변의 시쓰기 환경은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보았다면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지털적 매체 변화는 인간의 상상력과 그 실현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활자문화시대의 글쓰기를 독자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이미 학생들은 이미지나 영상으로 표현되지 않는 어떤 문화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미지로 표현되지 않는 활자책을 읽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학생들은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우리 시대의 시쓰기의 변화의 징후가 이론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상황임을 단정적으로 지적한다.
이제 더 이상 시가 문자만을 고집할 수 없는 디지털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지금 이 시간에도 시는 문어언어를 넘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문학 현상으로 디카시(詩), 시 배달 서비스, 전자책, 오디오 북, 인터넷으로 들어선 작가 등을 소개한 <작가와 독자 '디지털로 소통하다>라는 기사7)도 눈여겨볼만하다.
이런 대중 매체의 관심과 함께 디지털 영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의 진화에 대하여 학문적으로도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상일은 디지털 시대의 시적 상상력은 언어의 재현성을 넘어서 문자에 도상적 기호(icon)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면서 이 경우 문자는 그 자체로 이미지가 되어 언어적 해석보다는 시각적 효과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낸다고 본다. 이러한 특성은 80년대 황지우에 의해서 실험되었던 형태시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이러한 탈언어적 상상력은 디지털 환경과 만나면서 사진, 그림, 만화, 플래시, 동영상 등이 결합된 상호텍스트적 양상으로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다. 지난 90년대 초반 대중문화 또는 하위문화의 시적 수용이 단순한 제재로서의 수용에 머물렀던 것과는 달리,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한 현대시의 상호텍스트성은 디지털 환경 그 자체를 시쓰기의 도구로 활용하는 적극적인 교성 양상을 보여주는 바로 디지털 카메라로 시쓰기에 활용한 디카시나 사진과 시의 결합인 포토포엠이 대표적인 양상이라는 인식이다.8)
3. 디지털카메라를 활용한 새로운 시쓰기 전략, 디카시
디지털 시대에 시가 문자예술을 넘어 영상언어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디지털카메라를 도구로 활용한 시쓰기는 디카시와 포토포엠이 대표적이라고 앞에서 하상일이 지적했지만, 여기서 포토포엠이라는 용어는 자칫 오독할 소지가 없지 않다.
포토포엠은 시와 사진을 결합시킨 산물이지만 일반적으로 시인이 쓴 시를 타인이 찍은 사진과 결합하는 방식어서, 애초에 시는 시대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사진은 사진대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이 둘이 필요에 따라 결합됨으로써 상호텍스트성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포토포엠이다. 따라서 포토포엠이라는 이름으로 결합되어져 있지만, 이 둘은 언제든지 분리된 채 따로 존재하면서 각자의 장르 나름으로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영도는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07 전국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사진과 시의 새로운 장르 탐색; 포토포엠(PhotoPoem)>9)이라는 논문에서 멀티미디어의 도래로 글과 영상이 결합하여 빚어내는 새로운 장르의 부상은 오래 전의 시서화에서부터 그림책이나 만화 등에서 보여주던 이코노텍스트와 또다른 국면인 디지털 영상 시대의 진화적 성격을 지니는바, 영상 시대의 산문형식이 영화이고 운문형식은 사진이라는 인식으로 시와 사진의 상생의 장르로 포토포엠을 제안하였다.
김영도가 제안한 포토포엠은 문자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문학이나 시각언어인 영상이 도상(Icon)의 영역과 상징(Symbol)의 영역이라는 차이가 나는 가운데서도 소통을 꿈꾸는 언어라는 관점에서 문자와 영상이 어우러져서 매혹적인 스펙트럼을 형성한다는 점, 사진과 시가 보다 진화된 이코노텍스트(Icnotext)로서의 새 장르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 등의 논지를 토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토포엠이라는 명칭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디카시라는 명칭과 중첩되는 것이다. 장영도는 디카詩나 디카 에세이의 디카(Digital Camera)는 상당해 기술 지향적인 측면의 단어여서 콘텐츠 개념으로 사진과 시의 특성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부절절하다고 보고 포토포엠이라는 용어를 제시했지만, 이미 2007 조선일보 ‘사이버 신춘문예’가 한국 일간지 역사상 처음으로 “응모자의 디카로 찍은 사진과 함께 쓴 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 개념으로 ‘디카 에세이’를 공모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역시 경향신문에서도 최근 젊은이 사이에 인기 높은 ‘디카’를 통한 글쓰기를 문학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신설된 ‘디카 에세이’ 부문을 신설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디지털 시대의 사진영상과 시의 상생의 새로운 장르로서의 이미 존재하고 있는 ‘디카시’라는 명칭이 있는데, 굳이 다시 기존의 ‘포토포엠’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의미로 명명한 것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처럼 보인다.10)
따라서 이 자리에서는 디지털카메라를 도구로 활용한 시쓰기 전략의 대표적 양상을 디카시로 한정하여 보고, 디카시를 대상으로 말하고자 한다.11)
각주 11에서 밝힌 디카시 연혁과 같이, 나는 2004년 4월 2일부터 동년 8월 6일까지 인터넷 서재(http://lso.kll.co.kr/)12)에 디카詩(dica-poem)라는 새로운 시문학 용어로 50편을 연재하였다. 그러면서 디카시는 서서히 공론화되기 시작했고, 나의 주도 하에 디카시 담론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운동으로 서서히 자리하게 되었다. 디카시 운동은 처음에는 나 혼자였으나 차츰 언론매체의 관심과 더불어 기성 문인들도 참여하여 하나의 에꼴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디카시라는 화두를 붙잡고 연재를 시작할 당시부터 디지털 영상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시의 장르가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그것은 문자만이 아니라 영상과 문자로 함께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을 디지털카메라로 찍고 문자로 재현하여 결합하는 방식이다. 이런 작업은 기존의 시화나 시사진과는 다른 작업이라는 인식이 선행된 것이다. 나는 디카시를 디카로 찍고, 쓰는 작업을 하면서 서서히 시론화 작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04년 9월에는 최초의 디카시집 <<고성 가도(固城 街道)>>(문학의 전당)를 출간하면서 시집 후기에 최초의 디카시론이라 할 수 있는 <디카시, ‘언어 너머 시……>를 발표했다. 이 글은 소략한 시론이지만 디카시의 기초 이론의 토대가 처음 마련됐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문덕수 시인이 "시는 언어예술이면서도 언어를 넘어선다"고 지적한 바 있듯이, 오늘의 시는 기존의 시론이나 틀 속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다. 시는 언어를 넘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디카시는 '언어 너머 시'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한 시다. 따라서 '디카시'는 단순한 시와 사진이 조합된 시사진(시화)이 아니다. 디카로 찍은 사진은 ‘언어 너머 시’다. 다시 말해 시의 노다지다.
금은 금광 깊이 파고 들어가서 채취하기도 하지만 사금 같은 경우에는 금덩어리로서 산출되기도 한다. 문자시가 전자의 경우라고 하면, 디카시는 후자처럼 시의 노다지를 언어 너머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글은 <디카시, ‘언어 너머 시……>의 전문(前文)으로 다소 거친 지적이지만 디카시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것이다.
첫째, 기존의 시가 전통적으로 지닌 언어예술이라는 카테고리 넘어, 디카시는 문자언어와 함께 디카영상을 광의의 언어로 수용한다.
둘째, 디카시는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자연이나 사물의 상상력(신의 상상력)으로 이미 구축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그 형상을 문자로 재현한다.
이 두 명제는 디카시의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시인의 상상력으로 시적 대상을 예술적으로 재구성, 혹은 변용시켜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언어 이전의 시의 형상이 존재해 있는, 가칭 ‘날시(raw poem)'도 상정해 볼 수 있다.13)
위의 두 명제와 함께 주목을 요하는 것이 디카시론을 구축하기 위해 내가 만든 신조어인 ‘날시’라는 용어다. 날시는 두 번째 명제에서 제시한 시인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물이나 자연의 상상력, 즉 신의 상상력으로 구축된 시적 형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기존의 문자시가 시인의 상상력으로 자연이나 사물을 소재로 하여 새로운 예술품을 창조해내는 것이라면 디카시의 날시는 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연이나 사물에서 어떤 경우 신의 상상력으로 빚은 시적 형상을 포착할 때 그것이 곧 날시가 된다. 따라서 디카시의 문자 재현 작업은 곧 날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디카시의 기본 명제를 중심으로 그간 논의된 몇몇 쟁점을 살펴봄으로써 디카시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가보도록 하겠다.
김열규는 <디지털 시대의 디카시>14)에서 디카시의 새로운 ‘언어관’과 ‘즉흥’을 거론하고 있다.
예컨대 바람이 불어서 감이 떨어지고, 낙엽이 지고, 그리고 그 위에 벌이 앉았다고 할 때, 낙엽과 감, 벌이 모두 훌륭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지요. 언어도 기호 속에 들어가는 것이고 세계가 전부 텍스트입니다. 따라서 이선생의 디카詩라는 것은 이런 새로운 언어관의 변화 위에 서 있는 한 증표證票라고 할 수 있겠지요. 거기다 제가 디카詩를 보면서 뭘 생각했느냐 하면 ‘즉흥卽興’입니다. 시에도 즉흥이 있고, 음악에도 즉흥이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이 즉흥곡卽興曲으로, 인류예술사에 늘 즉흥이 존재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술은 한쪽에서는 노동이고 고역인데 한쪽에서는 즉흥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이 즉흥의 발언권은 이선생의 디카詩를 통해서 문득 더 커지는 거지요.
김열규는 소쉬르의 기호학을 예로 들면서 디카시가 문자언어를 넘어선 자연이나 사물이라는 텍스트를 시의 언어로 수용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임을 지적하였다. 디카시가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는 것은 기호학적 언어의 확장 측면에서 파악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동안 시의 언어는 문자예술이라는 좁은 의미의 언어에 갇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영상 시대를 맞아 디카시가 보다 광의의 언어관을 지니는 것은 시대 조류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디카시가 날시의 (극)순간 포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김열규가 말하는 ‘즉흥’은 디카시의 속성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원래 서정시란 연속적이고 역사적인 또는 서사적인 시간에 관심이 적은 것이 본질이기 때문에 경험이나 비전이 집중되는 結晶의 순간들 속에 존재한다는 점15)에서도 디카시의 극순간포착의 즉흥은 시의 본질에 충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열규는 즉흥은 인간의 영감과 연계된 것으로 보는데, 여기서 영감은 철저하게 장인정신이 쌓이고 쌓여서 생겨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장인정신과 영감이 하나가 된 즉즉흥이어야 한다는 논지다. 즉흥으로 찍지만 보는 사람이 디카시를 오래 들여다보게 만들어서 시선을 고착시켜야 하는, 즉 즉흥성이면서 내포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극순간성과 메타포가 조화를 이루어야 디카詩로써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열규가 말하는 ‘즉흥’은 극순간 포착을 전제로 하는데, 이에 대해 박찬일은 디카시 세미나 발제 논문 <시와 소통>16)에서 ‘시적 충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시적 장면”(혹은 시적 형상)의 “포착”은 전통적인 창작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시적 충동’과, 혹은 詩魔와, 다를 바가 없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충동 말이다. 시적 충동이 시적 충동을 불러일으킨 자연이나 사물에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게 하고, 시인은 그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문자시로 재현한다. 발제자는 시적 충동이 시에서 중요한 만큼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 또한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시적 충동이나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神性의 영역이다.
박찬일은 시적 장면’(혹은 시적 형상)의 포착은 전통적인 창작미학적 관점에서 ‘시적 충동’, 혹은 ‘詩魔’와 같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디카시에서는 시인의 의지보다는 시인 밖의 의지가 개입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다 분명한 관점을 제시한 문덕수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상옥 시인은 시인의 기능에 대한 종래의 개념을 뒤엎는다. 그만큼 과격하고 혁명적이다. "디카시의 화자는 사물과 자연의 입이고, 때로는 신의 대언자로서 전달의 통로가 되는 셈"(동상, p.80)이라고 말한다. "디카시의 화자"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냥 디카 시인이라고 해도 괜찮다. 어쨌든 이상옥은 여기서 시인을 창조적 주체라기보다는, 이미 필자도 말한 바 있는 '에이전트'(agent)의 개념에 접근하고 있다고 하겠다.17)
문덕수는 디카시에 대해 큰 관심을 표명해오고 있는데, 디카시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부각하는 것이 ‘대언자’라는 관점에서 디카시에서는 ‘시인’에 대한 종래의 생각은 불가피하게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즉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제2의 창조자(maker)라는 개념, 시대의 입법자나 예언자라는 개념 등은, 단지 현대 문명 속의 언어적 행위자나 개인을 넘어선 복합적 환경 시스템의 대리인 즉 에이젠트(agent)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8)
그리고 문덕수는 디카시의 영상과 문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층적으로 해석한다.
이상옥 시인이 주창하는 디카시는 문자와 영상, 기록과 촬영, 의미와 영상이미지의 통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기록된 의미인 문자와 사물을 촬영한 영상이미지와의 관계가 상호 보완이냐, 각각 별개로 독립된 병존(倂存)이냐, 양자 통합이냐(2위 1체) 하는 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모든 요소의 종합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상호 보완하면서 병존하여 통합된 기호조직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19)
나는 디카시의 영상과 문자의 관계를 2위1체의 동체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문덕수는 ‘상호 보완’과 각각 별개로 독립된 병존(倂存)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포괄하는 3가지 요소의 종합적 관점으로 파악한다.
한편 송용구는 <생태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디카詩’ 운동과 ‘대중문화’>20)에서 디카시의 시인이 완벽한 생태주의 시인으로써 영상과 문자의 관계를 조명한다.
그는 ‘만물은 신이 써놓은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의 책 속에 생생하게 적혀있는 생명의 법칙과 시적(詩的) 형상을 정신의 렌즈로 일순간에 포착하여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만물의 시적 형상에 이름을 지어준다. 완벽한 ‘생태주의’ 시인의 탄생이다.
송용구는 디카시의 시인은 문자를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만물의 시적 형상에 이름을 주어주는 완벽한 생태주의 시인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송용구는 시적 형상의 문자 재현에 대해서도 매혹적인 해석을 가한다.
시인은 ‘디지털 카메라’의 렌즈를 자신의 눈에 동화시킨다. 과학기술로부터 차용한 고감도의 전자감응력을 정신의 렌즈 속으로 흡수한 후에 만물이 입고 있는 시적 형상의 옷을 발견하거나 포착하여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살아있는 시의 형상을 재생한다. 문자(文子) 속에 갇혀 있던 시적 형상을 해방하고, 자연과 만물 속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스런 시의 얼굴을 노출시킨다. 이 때, 사진은 시가 살고 있는 집으로 변화하고, 문자는 그 집의 이름을 나타내는 예술적 문패 혹은 미학적 이름표로 승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상옥 교수는 ‘디카시’를 ‘멀티언어예술’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디카시’는 단지 사진과 문자의 결합으로 인하여 생겨난 합성적 예술작품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그렇게만 바라본다면 ‘디카시’의 문화적 함의(含意)를 매우 제한하는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디카시’가 생성되는 과정 속에서 다중적(多重的) 매체들의 연합과 협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디카시’는 기술문명의 힘, 미디어의 역할, 시인의 상상력, 문자의 언어기능이 조화롭게 융합하여 생겨난 ‘멀티언어예술’의 구현물이자 ‘다매체 시대의 테크노 언어예술”인 것이다.21)
송용구는 디카시를 정체성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물의 시적 형상에 이름을 지어주는 완벽한 생태주의 시인으로서, 디카시의 시인은 제2의 창조로서의 시인이 아니라, 대언자로서의 시인이라는 점이 송용구의 논의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디지털 영상인 디카영상을 광의의 언어로 수렴하는 “멀티언어예술’의 구현물이자 ‘다매체 시대의 테크노 언어예술”이라는 점도 디카시가 전통적 의미의 언어예술이란 관점을 넘어서고 있음을 잘 보인다..
이상의 논의에서 드러나듯이, 디카시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 즉 날시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하여, 영상과 문자가 하나의 텍스트(2위1체)로 구축되는 것으로, ‘날시’, ‘극순간성’, ‘즉흥’, ‘시적 충동’, ‘에이전트’, ‘생태주의 시인’ 등의 용어가 환기하는 다양한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디카시는 디지털 영상 시대의 새로운 펜의 역할을 하는 디지털카메라를 도구로 활용한 디지털 시대 시쓰기의 새로운 전략의 소산으로, 앞으로 디카시가 더욱 다양한 논의를 거쳐 보다 진전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의 한 모형으로 자리잡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김성곤, <<퓨전시대의 새로운 문화 읽기>>(문학사상사, 2003),p.211.
2) 최혜실, <<디지털 시대의 문화 읽기>>(소명출판사, 2001),pp.16-24.
3) 강현구, 김종태, <<대중문화와 뉴미디어>>(도서출판 월인, 2003),p.65.
5) 이성우, <<0/1의 세계에서 시란 무엇인가-디지털 기술과 한국 현대시>.(고려대학교출판부, 2007),pp.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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