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디카시 (반년간 디카시 통권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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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영 댓글 0건 조회 17,887회 작성일 15-05-21 12:41본문
가을 편지 / 정한용
벗어놓았군요 당신 가터벨트
봄 여름 뜨겁게 섞인 몸길로 천 개의 달이 지나가고
갈 겨울 북벽에 스며 하나 되었군요
길에서 / 최준
꽃도 꽃이었다 한때
글썽이고 일렁이던 그대와 나, 촛불이었다
사위는 순간 서로가 지워졌다 자취 없이 사라져 갔다
타오르기는 했던가 만난 적 있었던가
오늘도 그 길 반추하며 서 있다
늙은 호박 / 송찬호
지난여름, 앰블런스에 실려 간 옆집 노인은 끝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노인이 심은 호박도 넓게 넝쿨을 뻗지 못하고 시들었다
다만, 멀리서 소식 없는 한 점 혈육 같은,
담장에 매달린 호박 한 덩이만 애호박에서 늙은 호박으로
순례 / 복효근
동아줄로 꼬인 번뇌의 길
일보일배 온몸으로 걷는다
다시는 못 올 길
성지가 아닌 곳은 없다
절명
-詩人
절명
- 詩人 / 박완호
감전된 마음 하나를 만났다.
거미줄을 붙들고 가까스로 매달린
금 간 심장이
죽을힘을 다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마지막 숨빛이 단발마로 반짝였다.
선물 / 김혜영
인큐베이터 안에서
넌 젖병을 물지 않더구나
아가, 네 입안에
밥알이 들어갈 때
폭죽이 터지듯 벚꽃이 웃었지
장독들 / 문성해
우묵함은 품는다는 것
사람이 매일 아침 오목한 손바닥 안에
세숫물을 담아내듯
저 독들도 곧 무언가를 품어
우려내거나 절여내거나 고아낼 것이다
엽서 / 우대식
노을에 앉아
나를 꺼내 읽는다
그 어디에도 사랑이라는 문자는 없다
꼭 걸어서 당도하라는 당신의 부탁만이
활판活版의 문자로 새겨졌을 뿐
적벽 / 김이듬
벽을 보여주세요
절벽을 세워 날 좀 막아주세요
달리다 다쳐 주저앉아버리자
보이는 물과 벽, 나의 몸속에서
날 에워싸고 잡아준 붉은 벽 한 질
노을 / 고영민
너도 핏줄이 있느냐
핏줄이 당기느냐
일구월심 번져가는
핏줄
인생 / 조용숙
거미야!
너만 몰랐구나
네가 밤새워 짠 그물에 걸려 허부적대는 이가
바로 너란 걸
꽃병 / 조재형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때
나는 한낱 칼집에 불과하다
사랑을 열어 그리움으로 채울 때
비로소 나는 꽃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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