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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 생성되는 시의 미학 / 오홍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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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영 댓글 0건 조회 21,195회 작성일 15-05-2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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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 생성되는 시의 미학
    - ‘머니투데이’에 실린 디카시를 중심으로 / 오홍진(문학평론가)

 


  디카시는 디카(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시작詩作이 이루어진다. 디카로 찍은 사진이 있고, 그다음에 시-언어 표현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디카시가 사진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중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디카시’라는 말마따나, 디카시는 사진 속에 펼쳐진 순간의 이미지를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한 편의 시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진의 이미지와 언어 표현이 제대로 맞물려야 양질의 디카시가 창작될 수 있다. 사진의 이미지가 언어 표현으로 이어지는 바로 그 과정에서 디카시의 묘미가 발산된다고나 할까. 기발한 언어 표현이 중시되는 기존의 시작과는 다르게, 디카시는 어떤 이미지의 사진을 독자에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언어 표현, 곧 디카‘시’의 성패가 좌우될 수 있는 셈이다.
  사진과 언어가 동시에 배치되어 있을 경우, 독자들은 사진에 먼저 시선을 두기 마련이다. 근래 ‘머니투데이’라는 인터넷 신문에 연재되는 다카시만 보더라도 디카시에 내재된 이러한 특성이 분명히 나타난다. 독자는 일단 사진을 보고 무언가를 생각한다. 시인이 어떤 현상을 보고 시적 영감을 받아 ‘사진’을 찍었듯이, 독자는 그 사진을 본 순간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시적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까 디카시에서 사진은 시적 순간을 내포하고 있는 문학적 이미지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순간이 없다면, 디카시 감상은 사진을 보고 시인의 시-언어 표현을 읽는 단순한 과정으로 끝나버린다. 독자 스스로 시적 영감을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 어찌 보면, 디카시의 감상을 수월케 하는 중요한 측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낳고 기른 제 자식 앉힐 구들 한 장 온전치 못한
  엄마 닮은 저 집엘 간다, 굽어 기운 다리로 겨우 걷는
  구순 노모의 몸집처럼 낡은 기둥 가까스로 버티어 선
  나 태어난 저 집엘 간다
  허무의 거울을 보며 세월을 빗질하는 엄마처럼
  무성한 들깻잎 울타리 삼아 애써 속내 감추고 시치미 뚝 떼는,
                                                               - 최광임 「저 집」

 

 

  허름한 집 한 채가 보인다. 뿌연 하늘 아래 고즈넉이 놓여 있는 이 집을 시인은 “저 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저’라는 지시어가 가장 먼 곳에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시 영역, 곧 언어 표현에 나타나거니와 사진 속의 집은 시인이 태어난 고향 집이다. 고향 집을 시인은 왜 ‘저 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까? 시간의 흐름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일까? “낳고 기른 제 자식 앉힐 구들 한 장 온전치 못한/ 엄마 닮은 저 집엘 간다,”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저 집은 그러니까 “엄마 닮은 저 집”을 가리킨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엄마는 온전치 못한 몸이 되었고, 시인이 태어난 고향집 역시 온전치 못한 집이 되었다. 구순 노모는 굽어 기운 다리로 겨우 걸음을 걷는다. 무성한 들깻잎을 울타리 삼은 저 집 또한 노모처럼 한쪽으로 기운 몸을 힘겹게 버텨내고 있다. 저 집에서 펼쳐진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허무의 거울을 보며 세월을 빗질하는 노모의 얼굴을 시인은 어느 순간 시간이 정지한 저 집에서 발견한다. 시간은 흐른다. 그러니 시간의 흐름, 곧 자연을 허무하다고 말하는 건 인간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허무’라는 말이 있어 인간은 저 집에 새겨진 ‘기억’을 인생사의 마디마디에서 문득문득 떠올린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겠다. 기억 저편에서 불려 나오니 고향 집은 말 그대로 “저 집”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먼 곳을 나타내는 언어가 가장 가까운 곳을 기억하는 언어로 변주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최광임의 「저 집」은 언어 표현만으로도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 사진이 없다고 해도 독자들은 시인이 이야기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진이 없는 상태로 시를 읽다 보면 ‘저 집’의 이미지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구순 노모의 몸집을 닮은 허름한 집을 떠올릴 수는 있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하나의 추상 이미지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다. 이상옥의 말대로라면 ‘날시(raw poem)에 해당되는 사진-이미지는 독자에게 한 편의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진이 보여주는 ’저 집‘의 이미지를 통해 독자는 시인이 이야기하는 고향 집의 구체적 이미지를 재구성한다. 허름한 저 집이 허름한 노모의 몸으로 이어지는 시적 변주의 순간을 독자는 사진-이미지와 언어 표현이라는 디카시 특유의 시작 과정을 경유하여 체득하게 된다고 하겠다.
  시인의 입장에서도 디카시는 언어 표현의 경제성을 실험할 수 있는 장처를 지닌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디카시는 사진으로 포착된 ‘날시’를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을 거쳐 시작이 이루어진다. 이상옥은 ‘날시’를 극순간적으로 포착된 이미지로 의미화하고 있는바, 기존의 시작에서 보면 날시는 시인의 발상법과 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디카시는 이러한 날시-이미지를 사진-이미지로 제시함으로써 시인이 최초로 떠올린 내용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언어의 소비를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다. 특히 시적 수다가 하나의 유행 기법이 되다시피 한 현대시의 경향을 생각한다면, 최소의 언어로 최대의 의미를 표현하는 디카시 언어의 이러한 특성을 우리는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듯싶다.

 


 

 

 


  산비둘기 구구대고
  까작까작 까치 울어쌓더니
  봄까치꽃이 피었다
  뒷집 푸른 기와집 늙은 수캐
  개부랄 늘어지겠다
                                     - 김해화 「개부랄풀」

 

 

 

 

 

 

  뱃속이든 마음이든
  비울 건 비우고 가야 속이 편하지!
                                        - 박후기 「해우소」


  보라색의 개부랄꽃이 사진 이미지로 실려 있다. ‘개부랄’이라는 원색적인 용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꽃의 이미지는 “뒷집 푸른 기와집 수캐/개부랄 늘어지겠다”는 시적 정황과 어울려 따뜻한 봄날의 정취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산비둘기는 구구대고, 까치는 까작까작 울어댄다. 봄까치꽃이 피니 늙은 수캐의 개부랄은 축 늘어진다. 달리 무엇을 표현하겠는가. 봄이 오는 것이 자연이라면, 늙은 수캐의 개부랄이 늘어지는 것 또한 자연이다. 김해화는 보라색의 개부랄꽃 한 송이로 이러한 자연을 노래한다. 개부랄꽃이 늙은 수캐의 개부랄로 이어지는 게 이 시의 묘미이지만, 한편으로 이 시의 묘미는 디카시의 간결한 언어 미학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선시禪詩는 아니지만, 선시풍의 정조를 디카시는 태생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박후기의 「해우소」에서도 나타나거니와, 디카시는 순간적으로 포착한 사물에 간결한 언어의 옷을 입히는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선시와 유사한 경향을 내보일 수밖에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해우소 옆을 지나가는 스님의 사진-이미지로 하여 “뱃속이든 마음이든/비울 건 비우고 가야 속이 편하지!”라는 간단한 진술이 한 편의 시로 제시될 수 있다. 이 시에서 사진이 없는 언어 표현은 무미하고 건조한 인상을 줄 뿐이다. 하지만 박후기의 이 시가 사진만으로 시가 되는 것 역시 아니라는 점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겠다. 사진은 날시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사진에 어울리는 언어 표현이 없다면, 위 시는 결코 한 편의 시로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박후기의 「해우소」는 사진을 통해 언어 표현으로 이어지고, 언어 표현을 통해 다시 사진의 이미지가 살아나는 디카시의 시작 과정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디카시의 선시 경향이 잘 나타나는 이 시를 디카시의 미래로 볼 수는 없겠지만, 독자 입장에서 이 시가 사진 속의 상황에 대해, 그리고 그 상황을 표현하는 언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계기를 부여하는 건 분명하다고 하겠다.

 

 

 

 

 

  신록은 배반처럼 또 나를 덮어오겠지요
  생은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할 때도 효시하듯
  나를 허공에 걸어두고
  싹을 틔웁니다


                                   - 정푸른 「세월歲月」

 

 

  정푸른은 메마른 겨울나무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한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앙각仰角으로 찍은 겨울나무의 이미지가 제시되어 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존재의 이미지로 읽을 수도 있고, 텅 빈 존재의 이미지로 읽을 수도 있다. 사진 이미지는 무엇보다 독자들을 다양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 상상력을 가로막는 사진-이미지는 독자의 사유를 가로막는 시만큼이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 이미지를 본 독자들은 곧바로 시를 읽는다. 그런데 “신록은 또 배반처럼 나를 덮어오겠지요”라는 시의 첫 구절이 가슴을 친다. ‘배반’이라는 시어가 신록이라는 말과 어울려 예상치 못한 사태로 번져간다. 나무가 푸르러지는 것이 왜 나무 자신에게는 배반인 것일까?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할 때에도 생은 싹을 틔운다는 뒷부분의 내용을 참고한다면, 헐벗은 나무가 곧 시적 화자 자신을 표현하고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헐벗은 나무의 이미지로 지나간 세월을 돌이키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시화하고 있다. 헐벗은 나무-나는 허공에 매달려 있다.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좋을 텐데, 봄이 오면 어김없이 싹이 나오고, 잎이 나온다. 시간의 흐름은 곧 자연이기 때문이다.
  김해화와 박후기의 시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위 시에서, 정푸른은 시인의 눈에 순간적으로 포착된 이미지를 통해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월이라는 이름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신록이 넘쳐난다고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은 아니며, 메마른 가지라고 시간이 늦게 흐르는 것도 아니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때가 되면 꽃이 진다. 사진으로 제시된 이미지는 어느 한 순간에 멈춰 있지만, 그 순간을 언어로 표현하는 시인은 여전히 시간을 ‘살고’ 있다. 순간의 이미지가 시간을 만나 시인의 언어로 표현된다. 사진 이미지가 시간의 바깥으로 나아간 대상을 공간화 하는 표현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시인의 언어는 그렇게 공간화 된 사물을 다시 시간의 흐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사진에 표현된 ‘저 순간’은 새로운 싹을 틔우는 언어 표현의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난다. 디카시 한 편만으로 우리는 시간의 바깥을 갈망하는 존재와, 시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일궈내는 존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하늘의 턱 밑에 돋은 비늘이 있다
  까불며 함부로 만지지 마라
  죽는다, 천둥 치고 벼락 쳐서
  하늘의 순리를 거스른 벌 받는다
  민심은 천심, 비늘이 바싹 섰다
                                       - 최금진 「역린」

 

 

  역린逆鱗은 용의 가슴에 거꾸로 난 비늘을 의미한다. 그것을 건든 이는 죽는다고 하여 역린은 일반적으로 ‘왕의 노여움’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최금진은 비늘 모양의 구름 이미지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민심은 천심”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시의 언어로 구현하고 있다. 역린은 하늘의 순리를 어긴 자들에게 내리는 하늘의 형벌이다. 하늘의 순리에 함부로 까불었다가는 천둥에, 벼락에 맞아 죽는다. 조선의 현명한 임금들은 벼락에 맞아 백성이 죽으면 자기 잘못이라 하여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했던가. 민심이 천심이라면 천심 또한 민심이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비늘이 바싹 섰다”고 강조한다. 누군가 비늘을 건드렸으리라. 하늘의 순리를 거스른 누군가가 있으니, 천둥이 치고 벼락이 칠 것이라고 시인은 선언한다. 최금진의 위 시는 사진 이미지만으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알아낼 수 없다. 사진 이미지는 언어 표현을 구체화하는 하나의 단서로써만 제시되어 있다는 말이다. 시를 읽고 나서야 독자들은 사진 이미지에 새겨진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게 된다. 사진 이미지를 시작詩作의 한 단서로 사유하는 시인의 태도를 위 시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디카시의 딜레마는 사실 이러한 사진 이미지와 언어 표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문제로부터 뻗어 나온다. 사진 이미지와 언어 표현의 절묘한 조화가 디카시의 궁극적인 목표겠지만, 디카시를 쓰는 과정에서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사진은 사진대로 무언가를 전달하려 하고, 언어 표현은 언어 표현대로 무언가를 전달하려 한다. 독자들의 눈은 우선 사진을 향하지만, 언어 표현을 통해 독자들은 사진의 내용을 항상 확인하려고 한다. 요컨대 디카시의 감상은 사진으로 시작해 언어 표현으로 끝난다. 그러나 사진 이미지가 강렬하면 언어 표현이 밋밋하게 느껴지고, 언어 표현이 뛰어나면 구태여 사진 이미지는 필요 없는 디카시가 자주 보인다. 이유야 어떻든 디카시는 아직도 ‘디카’의 영역과 ‘시’의 영역이 맛깔스럽게 접맥되어 있지는 않은 듯싶다. 창작에 임하는 디카시인들이 일반의 시작과는 다른 관점에서 디카시를 사유하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겠다.

 

 

 

 

 

  누가 건넜나,
  마르지 않는 가슴
  오독오독 새겨대는
  고백의 문장.
  기원전 새겨놓은 그리움의 화석.
                                  - 변종태 「오독」

 

 

  모든 시작은 세계에 대한 오독에서 시작한다. 사진 이미지로 제시된 모래사장의 기호가 화살표든, 새의 발자국이든,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든 시인-독자들은 자신이 보는 사물을 오독함으로써 사물의 본질로 들어서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사진에 새겨진 기호는 어딘가를 향해 갔을 존재의 흔적을 보여준다. 누군가가 모래사장 위에 “오독오독” 새긴 그 흔적이 있어 시인들은 시를 쓰고, 독자들은 그 시를 읽는다. 시인의 말마따나 모래사장의 기호는 “고백의 문장.”이고 “기원전 새겨놓은 그리움의 화석.”이다. 기원전이라고 시인은 표현했지만, 시간의 바깥이라고 바꿔 말해도 상관없다. 시간은 흘러가기만 하는 게 아니다. 시간은 그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흔적을 남긴다. 기억이라고 해도 좋고, 추억이라고 해도 좋다. 그 기억이 모여 인생을 만들고, 그 인생이 모여 생명의 역사를 만든다. 오독한다고 해서 그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생명의 역사는 그러한 오독의 상상력을 통해 더 깊고 더 넓은 세계로 뻗어 나갔는지도 모른다.
  2004년에 닻을 올린 디카시 운동은 이제 10년의 역사를 훌쩍 넘겼다. 광활한 문학사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이 시간을 거치며 디카시의 영역은 그만큼 확장되어 왔다. 해마다 고성에서 디카시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고, 많은 시인들과 독자들이 디카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짧은 역사만큼이나 디카시는 해결해야 할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날시’ 등과 같은 디카시의 개념들이 좀 더 정교화 될 필요가 있고, 그것들이 시작 과정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도 있다. 디카시의 장르적 특징을 고구하는 학문적 작업 또한 무엇보다 시급하다. 디카시의 대중화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정작 디카시의 예술적 바탕을 탐색하는 일은 등한시하기 쉽다. 해마다 많은 시인들이 디카시를 발표하고 있지만, 그것이 기존의 시작과 어떻게 다른지, 그 표현 방법이 기존의 방법과 어떻게 다른지 면밀하게 살펴본 글들은 드물지 않나 싶다.
  시를 읽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는 이 시대에 디카시를 쓰는 일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것은 시를 쓰고 읽는 일이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일인지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상문화의 스펙터클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디카시는 그러한 스펙터클 문화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인문학적 힘을 제공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작품들에도 잘 드러나거니와, 디카시를 통해 우리는 지금 이 시대의 문제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대면하게 된다. 주변의 수많은 대상들에 시안詩眼을 집중함으로써 시인들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어떤 세계를 시(어)로 펼쳐낸다. 디카시의 대상은 반드시 사진 이미지로 공간화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디카시는 일상화된 사물을 관찰하는 시인의 눈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일상적인 것이 시적인 것으로 변주되는 순간을 디카시는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바, 일상으로부터 생성되는 이러한 힘이 어떻게 보면 디카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인지도 모르겠다.

 

 


오홍진     대전 출생.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
           동국대 국문과 박사 과정 수료. 저서 『한국문학과 대중문화』 외.

 

 

<반년간지 '디카시' 통권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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